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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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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제프 괴벨스는 1897년 독일에서 태어난 나치 독일의 정치인으로, 나치당 선전부 장관으로서 대중 선동과 미디어 조작을 통해 나치 정권 유지와 제2차 세계 대전 수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앓았던 질병과 장애로 인해 군 복무를 거부당했으나, 대학에서 문학과 역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20년대 나치당에 가입하여 선전 활동을 시작, 1933년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에 임명된 후, 언론, 영화, 라디오 등 모든 매체를 통제하며 반유대주의 선전을 펼쳤다. 전쟁 중에는 총력전을 선동하며 국민을 동원했으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히틀러의 자살 이후 총리가 되었고, 곧 자녀들을 살해한 뒤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그의 선전 기법은 현대 정치에서도 연구되며, 대중 심리 조작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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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괴벨스
기본 정보
1933년의 괴벨스
괴벨스 (1933년)
출생 이름파울 요제프 괴벨스
출생일1897년 10월 29일
출생지라인 주, 라이트, 독일 제국
사망일1945년 5월 1일
사망지베를린, 독일
사망 원인자살 (청산가리 중독 또는 총상)
국적독일
직업선전가
정치인
언어학자
학력본 대학교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뮌헨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철학박사, 1921년)
배우자마그다 리첼 (1931년 12월 19일 결혼)
자녀괴벨스 아이들
서명
정치 경력
정당나치당 (1924년부터)
직함국가 지도자
독일 총리재임 시작: 1945년 4월 30일
재임 종료: 1945년 5월 1일
대통령: 카를 되니츠
전임: 아돌프 히틀러
후임: 루츠 슈베린 폰 크로지크 (수석 장관)
베를린 시장재임 시작: 1944년 4월 7일
재임 종료: 1945년 5월 1일
전임: 루트비히 스테크
후임: 폐지
선전 장관재임 시작: 1933년 3월 14일
재임 종료: 1945년 4월 30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
전임: 신설
후임: 베르너 나우만
베를린 대관구지휘자재임 시작: 1926년 10월 26일
재임 종료: 1945년 5월 1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
전임: 에른스트 슐랑게
후임: 폐지
추가 직위베를린 대관구 국민돌격대 사령관 (1944년~1945년)
총력전 담당 전권대표 (1944년~1945년)
나치당 제국지도자 (1933년~1945년)
대독일 제국의회 의원 (1933년~1945년)
국회의원 (1928년~1933년)
기타 정보
군 복무독일 국방군 베를린 방위 총감
황금 당원 명예장소지
마지막 유언히틀러의 유언
로마자 표기Paul Joseph Goebbels

2. 어린 시절과 가계

1897년 10월 29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라이트에서 아버지 프리츠 괴벨스와 어머니 카타리나 오덴하우젠 사이에서 태어났다. 괴벨스의 부모는 모두 소박한 가정 배경을 가진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 프리츠는 공장 사무원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네덜란드 마을에서 네덜란드인과 독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괴벨스에게는 콘라트, 한스,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등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요제프는 어렸을 때 폐렴을 앓는 등 병약했고, 1901년 4세 때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고 내반족이 되었다. 수술은 실패했고, 평생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고, 자신을 열등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내성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신체적 결함을 지식으로 만회하려 노력했고, 이는 훗날 지식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4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고, 1908년 김나지움에 진학하여 최상위 성적을 거두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그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꼈다. 1932년 괴벨스는 외할머니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소문을 반박하기 위해 가계도 팸플릿 출판을 의뢰했다.

2. 1. 가계

콘라트 괴벨스는 농부였으나 도시 노동자로 이주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살았다.[1] 그의 아들인 프리츠 괴벨스는 1867년에 태어나[1] 공장 지배인이 되어 프티부르주아 계급이 되었다.[1] 1892년, 프리츠 괴벨스는 카타리나 오덴하우젠과 결혼하여 요제프 괴벨스를 포함한 여러 자녀를 두었다.[1]

요제프 괴벨스의 형제자매로는 콘라트(1893~1949), 한스(1895~1947), 마리아(1896~1896), 엘리자베트(1901~1915), 마리아(1910~1949)가 있었다.[2] 이 중 누나 마리아와 여동생 엘리자베트는 요절했다.[1]

2. 2. 출생과 성장 배경

1897년 10월 29일,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라이트(Rheydt)에서 아버지 프리츠 괴벨스와 어머니 카타리나 마리아 오덴하우젠 사이에서 태어났다.[1] 괴벨스의 가족은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아버지는 공장 사무원, 어머니는 네덜란드 출신이었다.[1] 괴벨스는 형제자매 5명과 함께 성장했으며, 부모는 그가 사제가 되기를 바랐다.

첫 영성체를 하는 괴벨스(오른쪽)(1910년)


어린 시절 폐렴과 골수염을 앓아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고 내반족이 되는 등 병약했다.[2]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하여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적 결함을 지식으로 보완하려 노력하여, 훗날 지식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4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괴벨스는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고, 1908년 김나지움에 진학해서도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다.

김나지움 재학 중인 괴벨스(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징병 검사에서 신체적 장애로 인해 불합격 판정을 받았고, 이는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2]

3. 학업과 정치 입문

1928년 5월 20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나치당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나치당은 약 10만 명의 유권자를 잃고 전국적으로 득표율 2.6%에 그쳤으며, 베를린에서는 1.4%로 더욱 저조한 결과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벨스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최초의 12명의 나치당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부경찰서장 바이스를 모욕한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던 것에서 면책되었다. 1931년 2월 국회는 면책 규정을 변경했고, 괴벨스는 전년에 걸쳐 《돌격대》에 게재했던 명예훼손성 자료에 대해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괴벨스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정권 시대의 모든 이후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계속 선출되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발행하는 신문 《베를리너 아르바이터차이퉁》(《베를린 노동자 신문》)에서는 괴벨스가 도시 유권자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당 전체적으로는 농촌 지역에서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두어 일부 지역에서는 1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선거 직전 아돌프 히틀러가 당 강령 17항(무보상 토지 몰수)이 유대인 투기꾼에게만 적용되고 사유지 소유주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선거 후, 당은 농업 부문에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노력을 재집중했다. 선거 직후인 5월, 히틀러는 괴벨스를 당 선전부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그는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그 자리에서 해임하면 당이 분열될까 봐 망설였다. 괴벨스는 자신이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학교와 언론에서 선전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930년까지 베를린은 뮌헨 다음으로 당의 두 번째로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다. 그해 나치와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폭력 사태로 인해 지역 돌격대 지휘관 호르스트 베셀독일 공산당 당원 두 명에게 총에 맞았다. 그는 나중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괴벨스는 베셀의 죽음을 이용하여 그를 나치 운동의 순교자로 만들었다. 그는 베셀의 행진곡 《깃발을 높이》(《Die Fahne hochde》)를 공식적으로 나치당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로 선포했다.

괴벨스는 1930년 사망한 호르스트 베셀(사진)을 "공산주의 하층민"에 대한 선전 도구로 사용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과 대학 생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괴벨스는 조국을 위해 참전하고자 했으나, 신체 검사에서 징병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2] 그는 다리의 장애 때문에 군의관에게 제대로 검사조차 받지 못하고 탈락했다. 많은 동급생들이 전선으로 떠나는 동안, 괴벨스는 김나지움에 남아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그의 형 두 명은 서부 전선에서 싸웠고, 형 한스는 1916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2]

1917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 진학 자격을 얻었다. 졸업 성적은 라틴어, 모국어, 종교에서 "우수"를 받았고, 그리스어, 프랑스어, 역사, 지리, 수학, 물리도 "양호"한 성적이었다.

1919년 대학 시절의 괴벨스


김나지움을 졸업 후,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생활고로 1917년 9월 가톨릭 자선단체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협회에 장학금을 신청하여 지원받았다. 훗날 반가톨릭 성향이 된 괴벨스는 이 장학금을 오랫동안 갚지 않았고, 1930년 협회는 국회의원이 된 그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장학금을 돌려받았다.

괴벨스는 괴테의 희곡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당시 독일의 일반적인 관례대로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1918년 여름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고고학자이자 고전 예술 연구가인 빈켈만을 연구했고, 겨울에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고대사와 근대사를 공부했다.

1919년 여름, 다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돌아왔으나, 이때부터 가톨릭 신앙심이 약해져 가톨릭 학생 연맹에서 탈퇴했다. 같은 해 겨울 뮌헨 대학교로 옮겼으나,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더욱 끊고 싶어했고, 장학금을 받은 학생의 의무였던 협회에 대한 학업 보고서 제출도 게을리했다.

1920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역사, 언어학, 미술, 문학을 공부했다. 1921년 봄부터 4개월에 걸쳐 박사 학위 논문 『'''극작가로서의 Wilhelm von Schütz|빌헬름 폰 쉬츠de. 낭만주의 희곡사에 대한 기여'''(Wilhelm von Schütz als Dramatiker.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s Dramas der Romantischen Schule)』를 집필하여, 1922년 4월 21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Dr. phil.)를 받았다.[3]

1921년의 괴벨스


대학 시절 괴벨스는 좌익적 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재학 중 공산주의자 출신 병사 리하르트 플리스게스(Richard Flisges)를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 빌헬름 2세와 독일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라테나우의 저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저서 등을 접하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또한, 바이마르 헌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신문 Berliner Tageblatt|베를리너 타게블라트de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다.

당시 괴벨스는 반유대주의적 경향이 적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Friedrich Gundolf|프리드리히 군돌프de 교수는 유대인이었고, 박사 논문 지도 교수 Max von Waldberg|막스 폰 발트베르크de 남작도 한쪽 부모가 유대인이었다.

3. 2. 나치당 입당과 초기 활동

1922년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25년 나치당에 입당했다.[1] 그는 자주 연단에 섰으며, 1925년 7월 11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회의 전날 히틀러와 처음 만난 후 그를 더욱 신봉하게 되었다.[1]

하지만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괴벨스는 당 지도부의 독재를 막기 위해 독일 북서부의 나치 세력을 결집했다. 그 결과, 그레고어가 발행인이 되고 괴벨스가 편집을 맡은 국가사회주의 서한을 발간했다.[1] 그들은 이 잡지를 통해 자신들의 뜻을 히틀러에게 관철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대화 자리를 갖기를 원했고, 히틀러가 독일 북서부 나치를 순방하던 중 1926년 11월 6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는데, 이때 괴벨스는 오히려 히틀러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만다.[2]

괴벨스는 드레스덴 은행의 쾰른 지점에서 일하던 시절 1923년의 대인플레이션을 경험하면서 독일 경제의 참상을 목격했다.[3] 그는 반자본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고, 이는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이어져 "'''국제 금융 유대인'''"에 대한 "생존을 위한 투쟁"을 주장하며 유대인 음모론을 싹틔우게 되었다.[3] 실업 후에는 유대계 기업을 포함한 여러 회사에서 채용을 거부당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강화했다.[4]

4. 나치당 내 권력 투쟁과 선전 활동

선전부는 행정 및 법무, 대규모 집회, 공중 보건, 청소년 및 인종, 라디오, 국내외 언론, 영화 및 영화 검열, 예술, 음악 및 연극, 그리고 국내외 반선전 활동 방지 등 7개 부서로 조직되었다. 괴벨스의 지도 방식은 격렬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고 고위 협력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바꾸곤 했으며, 까다로운 상사였고 직원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자신의 직무에서 성공적이었다. 1938년 ''라이프''지는 "[그는] 개인적으로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좋아하지 않으며, 가장 효율적인 나치 부서를 운영한다."라고 보도했다. 존 건터는 1940년에 괴벨스가 "모든 나치 중 가장 영리하다"라고 썼지만, "모두가 그를 싫어하기 때문에" 히틀러를 성공시킬 수 없다고 썼다.

1933년 6월, 영화 산업 종사자들은 모두 제국 영화 협회(Reich Film Chamber)에 가입해야 했다. 괴벨스는 나치 성향을 가진 영화와 잠재의식적 또는 공공연한 선전 메시지를 담은 영화 제작을 장려했다. 1933년 9월에 설립된 제국문화회의 산하에 괴벨스는 방송, 미술, 문학, 음악, 언론, 연극 분야에 추가적인 하부 회의를 추가했다. 영화 산업과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자 하는 사람은 해당 회의의 회원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권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사람은 선택한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배제하고 침묵시킬 수 있었다. 또한 언론인(이제 국가의 직원으로 간주됨)은 1800년까지 아리아인 혈통을 증명해야 했고, 결혼한 경우 배우자에게도 동일한 요구 사항이 적용되었다. 어떤 회의 회원도 사전에 회의의 허가 없이 업무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다. 책을 검열하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승인된 작품 목록에 없는 작품은 재출판할 수 없었다. 유사한 규정이 다른 미술 및 오락에도 적용되었으며, 심지어 카바레 공연도 검열되었다. 많은 독일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이러한 제약 하에서 일하기보다는 전쟁 전 시기에 독일을 떠났다.

1938년 괴벨스의 생일에 베를린에서 무료 라디오가 배포되었다.

4. 1. 베를린 가우 지도자 임명과 선전 전략

1926년, 요제프 괴벨스는 베를린 가우 지도자로 임명되어 지역 당 조직 강화와 선전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맥주홀과 길거리에서 싸움을 조장하고, 독일 공산당을 공격하는 등 폭력적인 선전 방식을 사용했다. 괴벨스는 상업 광고 기법을 정치에 적용하고 대중의 잠재의식에 호소하는 선전물을 제작하여, 나치당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4. 2. 언론 장악과 대중 선동

괴벨스는 당시 새로운 대중 매체였던 라디오를 장악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1] 그는 각 주(특히 헤르만 괴링이 이끌던 프로이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국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여 1934년 7월 국영방송협회 산하에 두었다.[2] 괴벨스는 제조업체들에게 국민수신기라는 저렴한 가정용 라디오를 생산하도록 장려했고, 1938년까지 거의 1천만 대가 판매되었다. 주요 당 방송을 거의 모든 독일인이 생방송으로 들을 수 있도록 공공장소, 공장, 학교에 확성기가 설치되었다.[1] 1939년 9월 2일(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다음 날), 괴벨스와 장관회의는 외국 라디오 방송 청취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외국 방송의 뉴스를 유포하는 행위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3] 알베르트 슈페어는 훗날 나치 정권이 "라디오와 확성기 같은 기술적 장치를 통해 8천만 명의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인 사고를 빼앗았다"고 말했다.[4]

1934년 뉘른베르크 집회에서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 연단 앞에는 레니 리펜슈탈과 촬영팀이 있다.


나치 선전의 핵심은 영웅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지도자로 숭배되며 개인숭배의 대상이 된 히틀러 자신이었다.[5] 이러한 숭배는 상당 부분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일부는 괴벨스의 선전 활동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것이었다.[6] 히틀러에 대한 찬양은 1934년 뉘른베르크 집회의 중심 내용이었으며, 이 집회는 레니 리펜슈탈이 감독한 나치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의 소재가 되었다. 이 영화는 1935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7] 1935년 나치당 대회에서 괴벨스는 "볼셰비즘은 유대인이 이끄는 국제적 하층민들이 문화 자체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고 선언했다.[8]

괴벨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준비에 참여했다. 그는 이 무렵 여배우 리다 바로바와 만나 1938년까지 관계를 지속했다.[9] 1937년 주요 사업은 괴벨스가 주도한 퇴폐미술전으로, 7월부터 11월까지 뮌헨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는 2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동원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10] 이듬해에는 퇴폐 음악 전시회가 개최되었다.[11] 한편, 괴벨스는 국민 사회주의 예술, 영화, 문학의 질적 수준이 낮다는 점에 실망했다.[12]

(뮌헨), 크리스탈나흐트 이후


괴벨스는 어린 시절부터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였다.[13] 나치당에 입당하고 히틀러를 만난 후, 그의 반유대주의는 더욱 심화되고 과격해졌다. 그는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파괴적인 세력으로 간주했다.[14]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그는 반복적으로 히틀러에게 유대인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15]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에도 불구하고, 괴벨스는 "인종 유물론은 쓰레기"이며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불필요하다고 말했다.[16] 그는 또한 하인리히 힘러의 이데올로기를 "여러 면에서 미친 것"이라고 묘사했고,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인종 이론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16]

나치당의 목표는 독일 문화 및 경제에서 유대인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17] 괴벨스는 선전 활동 외에도 포그롬, 법률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유대인 박해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18] 그가 정권 초기 베를린에서 시행한 차별 조치에는 대중교통 이용 금지, 유대인 상점 표시 의무화 등이 있었다.[19]

1938년 11월, 독일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가 파리에서 젊은 유대인 헤르셸 그린슈판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괴벨스는 언론을 통해 선동적인 반유대주의 자료를 배포하도록 지시했고, 그 결과 포그롬이 발생했다.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공격받고 시나고그가 파괴되었다. 11월 8일 밤 당 회의에서 괴벨스가 한 연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독일 국민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위장하여 당원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폭력을 선동하도록 은근히 부추겼다. 최소 100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수백 개의 시나고그가 파손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수천 개의 유대인 상점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크리스탈나흐트」(깨진 유리의 밤)라고 불린다. 약 3만 명의 유대인 남성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20] 11월 12일에 열린 회의에서 헤르만 괴링이 유대인 재산 파괴는 결국 몰수될 것이라는 의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 재산 파괴와 같다고 지적한 후 파괴는 중단되었다.[21]

괴벨스는 히틀러의 1939년 1월 30일 라인강 연설에서 절정에 달한 집중적인 반유대주의 선전 운동을 계속했으며, 괴벨스는 이 연설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2]

노란 배지를 착용한 베를린의 여성


괴벨스는 1935년부터 베를린 유대인들의 추방을 압박해 왔지만, 1940년에도 여전히 6만 2천 명이 베를린에 살고 있었다. 추방이 지연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군수 산업 노동자로 필요했기 때문이다.[24] 독일 유대인들의 추방은 1941년 10월에 시작되었으며, 베를린에서 첫 번째 수송대가 10월 18일에 출발했다. 리가카우나스와 같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일부 유대인들은 총살당했다.[25] 추방 준비를 위해 괴벨스는 1941년 9월 5일부터 모든 독일 유대인이 식별용 노란 배지를 착용하도록 명령했다.[26] 1942년 3월 6일, 괴벨스는 반제 회의 의사록 사본을 받았는데,[27] 이는 유럽의 유대인 인구가 점령된 폴란드 지역의 절멸 수용소로 보내져 살해될 것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28] 당시 그의 일기에는 그가 유대인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아마도 그들 중 60%는 제거되어야 하고, 40%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 유대인들에게 야만적이지만 철저히 마땅한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고 그는 1942년 3월 27일에 썼다.[29]

괴벨스는 히틀러와 유대인의 운명에 대해 자주 논의했으며, 그들이 만날 때마다 거의 매번 이 주제를 논의했다.[30] 그는 유대인들이 멸절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그렇게 공개적으로 행동한 몇 안 되는 나치 고위 관리 중 한 명이었다.[31]

4. 3. 대공황과 나치당의 부상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나치당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다. 괴벨스는 이 위기를 이용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나치당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주력했다. 그는 실업과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나치당이 독일을 다시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다.

1930년, 괴벨스는 나치당의 선전 전국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전국적인 선거 운동을 조직하고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괴벨스는 라디오, 영화, 집회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나치당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이는 나치당의 지지율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는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연설과 선동적인 구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나치당으로 끌어들였다.

괴벨스의 뛰어난 선전 전략과 대중 동원 능력 덕분에, 나치당은 1930년 총선에서 18.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급부상했다. 이는 대공황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성과였으며, 나치당이 독일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 나치 정권 하의 선전 장관

시칠리아 연합군 상륙 작전(1943년 7월)과 쿠르스크 전투(1943년 7~8월)에서 소련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자, 괴벨스는 전쟁에서 더 이상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21] 그는 히틀러에게 소련 또는 영국과의 별도 평화 협상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히틀러는 두 제안 모두를 거절했다.[21]

독일의 군사적,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1943년 8월 25일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내무장관직을 맡았다.[21] 베를린과 다른 도시들에 대한 집중적인 공습으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22] 1944년 4월 7일 괴벨스는 베를린 시장으로 임명되어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행정 통제권을 장악했다.[23]

괴벨스(중앙)와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괴벨스 왼쪽)가 1943년 8월 페네뮌데에서 로켓 시험을 참관하고 있다.


괴링의 독일 공군은 1944년 초 런던에 대한 공습으로 보복을 시도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1] 괴벨스는 V-1 비행 폭탄이 전쟁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선전을 계속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21]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연합군은 프랑스에 성공적으로 발판을 마련했다.[24]

1945년 3월 9일: 괴벨스가 16세의 히틀러 유겐트 빌리 휘브너에게 라반(현재 폴란드 루반) 방어에 대한 철십자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44년 7월, 괴벨스는 7월 20일 음모 이후 전쟁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국방군과 군수 산업을 위한 인력을 확보했다.[21] 그러나 이 조치는 군수장관 슈페어와 갈등을 빚었다.[21]

1944년 9월 25일, 히틀러는 전국적인 민병대인 ''폴크슈투름''(인민 폭풍)을 편성하도록 명령했고, 괴벨스는 베를린 대가우의 폴크슈투름 지도자로 임명되었다.[24][25] 그러나 대부분 훈련과 무장이 부족했던 폴크슈투름은 소련군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다는 괴벨스의 생각은 비현실적이었다.[22][24]

괴벨스는 전시에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언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26] 1945년 3월 13일 연합군 공습으로 괴벨스의 부처는 파괴되었고, 4월에 그는 선전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이미 소련 적군이 베를린에 진입한 후였다.[28]

5. 1.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임명과 역할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아돌프 히틀러는 요제프 괴벨스를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에 임명했다.[19] 이 직책에서 괴벨스는 독일의 문화와 언론을 통제하며 나치 이념을 전파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괴벨스는 선전성을 통해 다른 부처의 권한을 흡수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내무성으로부터 검열권, 경제성으로부터 광고 감독권, 외무성으로부터 대외 PR 권한 등을 가져왔다.[19] 또한, 전국의 극장을 관할 하에 두었다. (프로이센 주의 극장은 헤르만 괴링의 지배하에 남았다)[19]

괴벨스는 라디오를 통한 선전에 큰 গুরুত্ব을 두었다. 그는 "19세기는 신문이었지만, 20세기는 라디오이다"라고 선언하며, 라디오를 대중 선동의 핵심 도구로 활용했다.[19] 각 라디오 제조업체에 라디오의 풀 생산을 지시하고, 외국 방송은 들을 수 없는 「국민 라디오」를 전국 28개 공장에서 대량 생산시켜, 저렴한 76DEM로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19] 그 결과, 독일의 거의 모든 가정에 라디오가 보급되었다.[19]

1933년 5월 10일, 베를린을 비롯한 전국의 대학생 나치당원들을 동원하여 공사립 도서관에서 유대인이 쓴 책 등을 잇따라 압수하여 광장에 모아 태웠다(분서).[19] 이 분서 집회에서 괴벨스는 "새로운 정신이 불사조처럼 날아오를 것이다"라고 연설했다.[19]

1937년에는 나치가 "퇴폐 예술"로 규정한 모더니즘표현주의, 추상회화 작품들을 모아 "퇴폐 예술 전람회"를 개최했다.[19] 샤갈, 클레, 키르히너, 놀데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19]

괴벨스는 영화를 통한 선전에도 적극적이었다. 1937년, 독일 최대 영화사 우파를 사실상 장악하고, 반유대주의 선전 영화부터 오락 영화까지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19]

5. 2. 언론 통제와 대중 조작

괴벨스는 제국문화회의를 설립하여 방송, 예술, 문학, 음악, 언론, 연극 등 모든 분야를 통제했고, 반체제 인사들을 추방했다.[19] 그는 저렴한 가정용 라디오 '국민수신기' 보급을 통해 나치 선전을 확산시키고, 외국 라디오 방송 청취를 금지했다.[20]

괴벨스는 "선전은 정신적 인식을 전달할 필요도 없고, 온화하거나 우아할 필요도 없다.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 좋은 선전이고, 원하는 성공을 놓치게 하는 것이 나쁜 선전이다.", "중요한 것은 선전 수준이 아니라, 그것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그 목적은 "대중의 획득"이며, "그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의 경험으로부터 효과적인 수법을 배웠다"라고 말했지만, 그가 말하는 선전 개념에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의 계승이 보인다.

베를린에서 선전 활동을 할 당시, 괴벨스는 베를린 시민을 "군중의 집합"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에 맞춘 기발하고 독창적인 선전을 했다. 디자이너 (필명·미엘니르)는 효과적인 선전 포스터를 제작하여 괴벨스로부터 "신의 은총"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괴벨스는 정치 선전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했다.

  • 가벼운 오락 속에 선전을 교묘히 숨겨 사람들이 선전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
  • 선전 내용을 직접적인 구호로 반복하기보다, 사람들의 불만, 의문, 욕망을 자극하여 폭발시키는 것
  • 지식 수준이 낮은 계층에 맞춰 선전하는 것


괴벨스는 1920년대부터 영화를 즐겨 보았고, 나치 집권 전에는 적의 작품이라도 좋은 것은 높이 평가했다. 그는 『니벨룽겐』과 『전함 포템킨』의 팬이었지만, 감독 과 에이젠슈타인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전함 포템킨』은 소련 공산주의 선전 영화였지만, 괴벨스는 개의치 않았다. 선전장관이 된 후, 그는 국가사회주의판 『전함 포템킨』 제작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5. 3. 반유대주의 선전과 홀로코스트

괴벨스는 어린 시절부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였다.[1] 나치 정권 하에서 그는 유대인 박해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에 일어난 반(反)유대주의 폭동인 '수정의 밤' 사건을 선동하고,[1] 유대인 강제 추방 및 학살을 정당화하는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1]

괴벨스는 아돌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연설 작성에 참여했으며,[1]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즉 홀로코스트를 지지했다.[1]

6. 제2차 세계 대전과 몰락

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6명의 아이들을 모르핀사이안화 칼륨으로 살해한 뒤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권총으로 동반 자살했다.[1]

소련군의 베를린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많은 정부 지도자와 나치 당 간부들이 베를린에서 탈출했지만, 괴벨스는 히틀러 곁에 남았다. 베를린 전투 중 아내와 여섯 자녀와 함께 히틀러의 총통 지하벙커로 거처를 옮겼다.[2][3] 지하벙커에 들어간 괴벨스는 선전성 업무는 제쳐두고 자신의 일기를 정리하는 데만 집중했다.[4] 1945년 4월 29일, 괴벨스는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결혼 증인이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다. 1945년 4월 30일, Last will and testament of Adolf Hitler|히틀러의 유언|히틀러의 정치적 유서영어에 따라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총통은 나에게 베를린을 떠나 새 정부의 수반으로 참가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처음으로 총통에게 복종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면서 "무조건 죽을 때까지 그(히틀러)의 편이 될 것"이며, "쓸모없는 삶을 총통 곁에서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5] 소련군과 조건부 항복 협상을 벌였지만, 소련군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결렬되었다.

1945년 5월 1일, 여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괴벨스 부부는 집단 자살로 괴벨스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죽음의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지만, 총리 관저 마당에서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 그 후 두 사람의 시체는 휘발유를 사용하여 화장되었지만, 불이 꺼져도 그을린 채로 방치되었다.[6] 이후 괴벨스 가족의 시신 행방은 오랫동안 알 수 없었지만, 냉전 종식에 따른 글라스노스트에 의해 1970년 히틀러 부부의 시신과 함께 발굴되어 완전히 화장된 후 엘베 강에 유골이 뿌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북미에서 전쟁포로로 잡혀 있던 하랄트 크반트였다. 크반트는 마그다가 전 남편 귄터 크반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1944년 공군 중위로 이탈리아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죽음을 면했다. 종전 후 그는 사업가로 활동하다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6. 1. 전쟁 선전과 국민 동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괴벨스는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고 국민들의 전쟁 지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선전 활동을 주도했다.[9] 폴란드가 폴란드 내 독일계 소수 민족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한다고 보도하여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9]

전쟁 초기에는 독일군의 승리를 과장하고,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선전을 전개했다. 1940년에는 독일 잠수함 U-47이 영국 해군의 모항 스캐퍼 플로에 잠입하여 전함 로열 오크호를 격침하고 883명의 전사자를 낸 사건을 이용하여, 윈스턴 처칠이 시한폭탄으로 배를 침몰시키려 했고 수백 명의 미국인들을 익사시키려 했다는 거짓 주장을 펼쳤다.[10]

전쟁 중기, 괴벨스는 국가를 총력전 상태로 전환하도록 히틀러를 설득하고, 관련 선동의 선봉에 섰다. 1943년 2월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에서 사회 고위층들을 상대로 행한 총력전 연설은 그의 강렬한 프로파간다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힌다.

전쟁 후반에는 불리한 전황을 은폐하고, 총력전을 통해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하려 노력했다. 대전 후기부터 말기에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열세로 돌아선 후, 히틀러는 국민들 앞에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은둔하게 되었지만, 괴벨스는 공습을 받은 도시의 피해자들을 자주 위문하여 격려했고, 국민들에게 전의를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고, 연합국군에 대해 끝까지 저항하도록 라디오로 국민들에게 호소했다.[11]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괴벨스는 오토 에른스트 뢰머 소좌를 전화로 직접 히틀러와 대화하게 함으로써 회유하여 반란 진압에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같은 해 7월 25일에 히틀러로부터 '''총력전 전국 지도자'''로 임명되어 내정 전반에 큰 발언권을 얻었다.[12] 괴벨스는 총력전 전국 지도자로서 1944년 10월까지 50만 명의 병사를 확보했고, 같은 해 말까지는 100만 명의 병사 확보에 성공했다.[13] 1945년 1월 30일에는 '''베를린 방위 총감'''을 겸임하여 수도 방위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1944년 11월 12일, 국민 돌격대를 사열하는 괴벨스

6. 2. 몰락과 최후

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6명의 아이들을 모르핀사이안화 칼륨으로 살해한 뒤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권총으로 동반 자살했다.[1]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북미에서 전쟁포로로 잡혀 있던 하랄트 크반트였다. 크반트는 마그다가 전 남편 귄터 크반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1944년 공군 중위로 이탈리아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죽음을 면했다. 종전 후 그는 사업가로 활동하다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소련군의 베를린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많은 정부 지도자와 나치 당 간부들이 베를린에서 탈출했지만, 괴벨스는 히틀러 곁에 남았다. 2월에 형 한스에게 과거 편지와 저서를 소각하도록 요청하고, 공개를 의식한 일기는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여 여러 사본을 만들었다.[2] 베를린 전투 중 아내와 여섯 자녀와 함께 히틀러의 총통 지하벙커로 거처를 옮겼다. 막다는 처음에 아이들을 구출하자고 주장했지만, 결국 괴벨스의 의견에 동의했다.[3] 지하벙커에 들어간 괴벨스는 선전성 업무는 제쳐두고 자신의 일기를 정리하는 데만 집중했다.[4] 1945년 4월 29일, 괴벨스는 당 관방장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결혼 증인이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다. 1945년 4월 30일, Last will and testament of Adolf Hitler|히틀러의 유언|히틀러의 정치적 유서영어에 따라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히틀러의 정치적 유서를 받고 "총통은 나에게 베를린을 떠나 새 정부의 수반으로 참가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처음으로 총통에게 복종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면서 "무조건 죽을 때까지 그(히틀러)의 편이 될 것"이며, "쓸모없는 삶을 총통 곁에서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5] 그 자격으로 소련군과 조건부 항복 협상을 벌였지만, 소련군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결렬되었다.

1945년 5월 1일, 여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괴벨스 부부는 집단 자살로 괴벨스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죽음의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지만, 총리 관저 마당에서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 그 후 두 사람의 시체는 휘발유를 사용하여 화장되었지만, 불이 꺼져도 그을린 채로 방치되었다.[6] 이후 괴벨스 가족의 시신 행방은 오랫동안 알 수 없었지만, 냉전 종식에 따른 글라스노스트에 의해 1970년 히틀러 부부의 시신과 함께 발굴되어 완전히 화장된 후 엘베 강에 유골이 뿌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 유산과 평가

괴벨스는 대중 선동과 미디어 조작을 통해 독재 정권을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선전 기법은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연구되며, 대중 심리를 조작하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괴벨스는 "선전은 정신적 인식을 전달할 필요도 없고, 온화하거나 우아할 필요도 없다.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 좋은 선전이고, 원하는 성공을 놓치게 하는 것이 나쁜 선전이다."라고 말하며, 선전의 목적은 "대중의 획득"이고, "그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라고 주장했다.[19]

괴벨스는 베를린 시민의 사고방식에 맞춘 기발하고 독창적인 선전을 많이 했다. 디자이너 한스 헤르베르트 슈바이처는 효과적인 선전 포스터를 제작하여 괴벨스로부터 "신의 은총"이라는 칭찬을 받았다.[19] 그는 영화를 전문 분야로 생각하여 시나리오와 배우 기용 등에 깊이 개입했다.[19]

괴벨스는 1933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것은 독일의 정신적 무기가 불을 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라디오를 이용한 독일 국민의 정신적 동원을 역설했다.[19] 그는 나치즘이 기술을 긍정하고 영혼으로 채워 독일 민족에 봉사하며, 근대의 문제에 영웅적으로 맞서는 "강철의 낭만주의"로 독일을 활기 띠게 할 것이라고 했다.[20]

괴벨스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속에 선전을 주입시켜 상대방이 선전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선전하는 것」, 「선전하고 싶은 내용을 직접적으로 캐치프레이즈화하여 강조·반복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불만·의문·욕망을 돌려서 자극하여 폭발시키는 것」, 「지식 수준이 낮은 계층에 맞춘 선전을 유념하는 것」을 정치 선전의 마땅한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주독 영국 대사였던 네빌 헨더슨은 "이 남자의 두뇌는 아마도 나치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명석했다. 결코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말은 항상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논리가 뛰어났고, 사적인 대화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공정하고 이성적이었다."라고 평가했다.[22] 앙드레 프랑수아-퐁세는 "정부 요직에 있던 매우 위험한 히틀러 신봉자 중 한 명이며, 그중에서도 아마 가장 교양 있는 인물일 것이다. 뛰어난 연설과 글쓰기 능력의 소유자로, 귀에 듣기 좋은 말을 쓰고 말한다."라고 평가했다.[22]

괴벨스는 일본에서 바이올린 천재 소녀로 화제가 되었던 스와 네지코에게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선물했다.[25] 찰리 채플린의 영화 「독재자」에서 괴벨스를 패러디한 가르비치 내무장관은 냉철하고 지능이 뛰어나며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반민주주의자로 묘사된다.

괴벨스는 후세의 영화에 자신이 등장하는 것을 꿈꾸었으며, 그의 이미지는 병적인 나치 세계를 그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배우였다. 올리버 힐슈비겔 감독의 영화 「히틀러 최후의 12일」, 다니 레비 감독의 영화 「나의 제자 히틀러」 등 여러 영화에서 괴벨스가 등장한다.

괴벨스의 말년에 비서·속기사로 일했던 브륀힐데 폼젤은 다큐멘터리 영화 「괴벨스와 나」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답했다.[30]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서적
[8] 서적
[9] 서적 ゲッベルス
[10] 서적 ゲッベルス
[11] 서적 第三帝国と宣伝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ゲッベルス
[15] 뉴스 ヒトラー側近ゲッベルスの大邸宅、ベルリン市が売却へ http://www.asahi.com[...] 朝日新聞社 2007-01-30
[16] 뉴스 Bogensee wird jetzt weltweit angeboten http://www.berliner-[...] Berliner Zeitung 2008-02-21
[17] 뉴스 Grundstücksveräußerungen In München steht ein Stück Berlin zum Verkauf https://www.berliner[...] Berliner Zeitung 2013-10-04
[18] 서적 Analyse Rhetorischer Stilmittel Der Faschistischen Rede Am Beispiel Der Sportpalastrede Grin Verlag
[19] 서적 ハーフ2010
[20] 서적 ハーフ2010
[21] 비디오 メディアと権力 第一部『大衆操作の天才・ゲッベルス』 http://pub.maruzen.c[...] BBC 2019-02-12
[22] 서적 炎と闇の帝国ゲッベルスとその妻マクダ 白水社 1995-06-30
[23] 서적 Vom Kaiserhof zur Reichskanzlei. Eine historische Darstellung in Tagebuchblättern https://archive.org/[...] Franz Eher Nachf.
[24] 서적 勝利の日記 第一書房
[25] 뉴스 諏訪根自子さんが死去 世界的バイオリニスト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2-09-25
[26] 간행물 SAPIO 小学館 2017-07
[27] 웹사이트 要点を絞り込み「知性」よりも「感情」に訴えかけよ https://news.livedoo[...]
[28] 뉴스 ナチス政権宣伝相ゲッペルスの秘書だった106歳独女性死亡  最後の生き証人として伝えたかったこと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17-03-25
[29] 웹사이트 「ユダヤ人の私」と辿るオーストリアの歴史 https://synodos.jp/o[...]
[30] 뉴스 ナチス宣伝相ゲッペルスの秘書、106歳で死去 https://www.afpbb.co[...] フランス通信社 2017-01-30
[31] 뉴스 ナチス政権宣伝相ゲッペルスの秘書だった106歳独女性死亡  最後の生き証人として伝えたかったこと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17-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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